1. 우리시대의 풍경 : 기술세계와 신화열풍

  오늘날 우리의 삶의 논리와 문법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의 세계를 조율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한 돈벌기에 온통 정신이 빼앗겨있는 우리들에겐 다소 생활을 거스르는 물음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또한 '의미' 의 차원을 망각하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있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에 대해 묻는 작업을 넓은 의미에서의 철학함 혹은 학문함 이라고 본다면, 대학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 모두의 과제는 '현대'를 설명하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 결제, 문화의 측면에서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논리와 문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과학과 기술의 문화이다. 현대에는 최소한 이것들에 대해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세계의 무대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 이러한 현대문명 혹은 문화의 주요성격 가운데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 그리고 이로 인한 디지털 문명, 인터넷 문화 시대의 도래 등과 같은 급속한 생활세계의 변화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우리의 매일 매일의 생생한 삶의 모습이 이것들에 의해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반(反)시대적인 현상처럼 보이는 이상한 현상을 목도한다. 신화열풍 현상이 그것이다. 서점에는 아이들을 위한 그리스ㆍ로마신화를 다룬 만화들이 즐비하고 학생과 성인을 위한 환타지 소설 등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와 있다. 이 소설들은 인터넷을 통해 이미 많은 독자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다.

  그렇지만 과학과 기술이 우리의 운명이 되어 버린 오늘날, 신화와 환타지 얘기를 한다고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특히 과학의 명료성에 매료되고 그로 인한 실용적인 삶의 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 할 것이다. 더군다나 인간의 사유도 뜻을 찾는 사유보다는 계산하는 사유가 힘을 발휘하는 현실 앞에서 신화 얘기를 꺼내다니 정말 시대를 모른다고 꾸짖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적 명석함, 기술적 편이함이 가져다주는 삶의 세계 속에서 과연 '우리는 인간적인 행복감을 느끼는가?', '우리의 사람됨이 제대로 성숙되고 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본다. 오히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형이상학적 허무감과 신화적 상상력의 부재 속에서 허탈해 하고 점점 더 소외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술시대에 왜 많은 사람들은 신화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가?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형이상학적 의미를 찾고 신화적인 상상력을 키워 우리의 삶을 더욱더 풍성하게 만들어 보자는 문제의식 아래 신화란 무엇이고 인간의 사유에는 어떠한 유형이 있으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나름대로의 신화를 가지고 살아가야 될 필요성에 대해 숙고 하는 일은 분명 이 시대를 읽어내려는 진지한 반성적 작업일 것이다.



2.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는 일반적으로 우주 및 자연 현상, 인간 세계, 개인 및 집단 심리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mythos), 해석(hermeneutike, interpretatio), 그럴 듯한 설명 및 이론적 체계(eikos logos)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신화가 과학과 다른 점은 과학이 객관적 법칙과 이론적 언어로 구성이 되는 반면 신화는 일산언어 및 상징체계로 구성된다라는 점이다. 따라서 신화 읽기를 위해서는 그 신화가 만들어진 부족이나 민족의 일상언어문법과 통용되고 있는 상징체계를 읽어내야 한다.

  여기에는 특히 종교와의 관련성이 깊으며 따라서 상상력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의 사유는 우리가 흔히 들은바와 같은 논리적 사유(la pensee logique, rationnelle, abstraite)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논리적 사유는 우리 주변의 사물들에 대해 구별하고 추상해 내는 분석적(analysis)사유이기 때문에 어떤 사태를 직설적,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해서 경험 대상에 대한 추상적, 범주적 이해를 추구한다. 반면에 인간의 신화적 사유는 놀이 및 상상의 논리(as if, also b)에 따라서 대상을 심파토스적(sympathos, 신체 전반을 통한 감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떤 사태에 대해 주관적으로 기술하려고 하며 경험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질적 체험을 추구한다.

  이러한 인간의 두 가지 사유경향을 쉬운 예를 들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어느 중소기업 사장이 자금독촉에 못 이겨 자살을 했다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보통 신문기자들은 언제, 어디서, 왜 등을 따져가며 그 사장이 자살을 하게 된 객관적인 사실을 보도하기 위해 쓸 것이다. 그러나 소설가는 그 사건을 그냥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이나 상상을 주관적으로 보태서 새로운 이야기, 즉 소설책을 한권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신화적 사유경험(la loide participation mystique)을 사실은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하면서 살고 있다. 어떤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의 주인공에 자신을 동일화(identification)시켜 완전히 그 영화의 세계에 빠져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인 러브>라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가 될 수도 있고, <매트릭스 3> 영화를 보면서 스미스와 결투를 벌이는 네오의 운명적 세계에 푹 빠져들 수도 있는것이다 .그리고 어느 종교의식의 세계에 직접 몸을 담아 봄으로써 그 종교 의식이 제공해 주는 새로운 현실이나 논리에 완전히 신체적, 감정적으로 빠져들어 그 세계에서 오히려 현실보다 더한 실재감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서구학자들이 신화적 사유는 원시 미개인들의 사유이고 논리적 사유가 선진적인 현대인들의 사유방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네들의 '강짜부리기'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신화적사유와 논리적 사유를 함께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대의 두뇌 생리학의 발달로 신화적 사유는 오른쪽 뇌가 논리적 사유는 왼쪽 뇌가 발달할수록 더 강한 경향이 나타난다는 사실도 발곃지고 있는 상황이다.


3. 신화 읽기와 신화 쓰기 그리고 Modus Vivendi(삶의 방식)

  이제 우리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신화적 사유와 논리적 사유를 다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살아가면서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찾고 신화적인 상상력을 키워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각자의 신화를 만들어 가야하는 필요성에 대해 얘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그 신화는 어느 책에서 찾든, 영화에서 차든, 토크쇼의 주인공의 삶에서 찾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살아가는 생활세계 전반을 통하여, 어떤 계기를 통해서 찾아도 괜찮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신화에 자신의 삶의 의미와 지향해야 할 목적을 투사해서 그 신화가 마치 지금 나의 현실에 실현된 것처럼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신화를 통하여 무한한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받으며 살아갈 용기와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전 세계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성서>>, 특히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삶의 신화를 찾고 그 신화를 자신의 삶의 신화로 만들어가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또한 자신의 신화를 찾아, 그 신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시다 가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라는 신화를 이 땅 위에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라는 신화에로 향해 자신을 내던진 삶을 사신 것이다. 그러기에 급기야는 십자가가 주어지는 삶을 스스로 떠맞으시는 것이다.

  서로가 위하려고 하는 사랑의 논리로 유지되는 공동체를 위해서는 나만의 욕심을 위한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이블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삶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로운 것을 구해야 함을 자신의 신화적 삶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지난 3월 16일에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 또한 자신의 삶의 신화를 찾고 그 신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매스컴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열여섯의 나이에 불가에 입문하여 구도자의 길을 걷고 계신 분으로서 베트남 전쟁당시 죽어가는 동포들을 위해 전 세계를 순회하며 전쟁을 반대하는 연설과 법회를 열고, 불교평화대표단 의장으로 파리평화회의를 이끌었다. 이런 활동으로 1967년 마틴 루터 킹 목사로부터 노벨 평화상 후보에 추천 받았지만, 이후 베트남 정부의 박해를 받아 귀국을 금지당하기도 하였다. 1960년 대 스님께서 주창한 '참여불교'는 내세론에 기댄 기존 불교의 빗장을 열고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기본정신으로 삼아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틱낫한 스님께서는 1980년대 초반 프랑스로 망명해서는 보르도 지방에 수행 공동체인 '플럼 빌리지'를 세웠다. 자두마을이란 뜻의 이곳은 '흙과 사람, 자연과 인간이 조화로운 곳'으로, 세계 각국에서 온 맣은 이들이 종교 간의 벽을 허물로 각자의 신념에 따라 수행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틱낫한 스님께서는 자신이 품고 사는 신화를 다양한 강연과 심포지움 그리고 수행을 통해 표현하였다. 그 신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생명, 환경, 평화를 위하여', '나누는 삶, 함께하는 행복', '고통을 넘어 희망 만들기', '내 안의 평화 그리고 화해', '일상에서 마음찾기' 등.

  한국을 방문해 자신이 품고 사는 신화를 말하기까지 틱낫한 스님은 많은 길고 지루한 시간을 견디시고 이겨내셨을 것이다. 때로는 고독한 때가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조국인 베트남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을 때는 정말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그 모든 아픔과 시련을 이겨내고 스님은 자신이 찾은 신화를 이루기 위해 당당하게 이겨내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신화를 찾고 만들어가는데 있어서는 시련과 유혹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시련과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우리는 늘 '깨어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틱낫한 스님도 강조하시는 mindfulness 말이다. 우리 모두 늘 '깨어있는 마음'을 가지고 순간에,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도 자신의 신화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룩하기 위해 늘 깨어있는 삶을 사시고 강조하셨던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떠한 자신의 신화를 살고 있는가. 혹시 자신의 삶의 신화가 없이 매스컴의 광고와 대중의 논리에 이끌려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만의 신화를 찾고 또 그 신화를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 어느 누가 '이것이 네가 살아야 할 삶의 신화이다'하고 건네주지 않는다.

  각자가 자신의 삶의 세계에 참여해서 일구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구고 가꾸는 시간과 그 시간과 더불어 투입하는 우리들의 노력과 정성이 어우러져 자신만의 신화는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의 공간이 신화적 공간으로 탈바꿈되는 주체적인 노력이 계속적으로 반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소크라테스의 '知行合一의 삶'이, 엘리다데와 캠벨의 '신화적 삶'이 그리고 리쾨르의 '상징을 통한 존재론적 구속의 삶'이 왜 더 실재적인 삶인지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삶의 주변에서 신화를 배제해온 현대인들은 결국 '조각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실증주의적으로 흐럴온 학문의 경향과 과학과 기수에 의해 우리의 생활세계가 식민지화되어온 결과 피폐한 영혼과 철이 덜 든 문화를 낳고 양산해왔다.

  그러므로 21세기를 맞아 인간의 변혁, 문명의 전환을 열망하는 많은 이들의 무의식적 꿈틀거림이 신화에로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신화 읽기와 자신의 삶의 신화 쓰기에 관심을 기운인다는 것은 결국 삶의 중심잡기, 자신만의 삶의 방식(Modus Vivendi)을 갈구하고 있다는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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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2003년 11월 25일 화요일, 선문대신물, 교수논단 - 조형국(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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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년간 모아놓은 자료들을 정리 하다가 학교 신문 하나를 발견 하였다,

걷표지가 아닌,

'내가 이 글을 왜 이제서야 보게 된 걸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당시 이걸 바로 읽을껄,, 하고,,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말,,  '그때에 그럴만 하니까 그렇게 되는거다' ,,,

어느날 아는분이 그런말을 하셨다,

     사람들의 회의를 하다가 이런 말을 하곤 하지,
        "그걸 왜 이제서야 말하는거야?"
     라고,, 그런데 사실 그건, 그때가 적절하게 알 때이기 때문에 말이 꺼내지는거야

라고 말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봐야할 때이기 때문에 본걸까?!

이런 생각을 해보며, 글을 타이핑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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